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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대단하지 못한 사람이 삶을 견디는 법[이주영의 연뮤덕질기](73)

2026.05.29 14:49

연극 <바냐 삼촌>·<반야 아재>·<미미의 미미한 연애>
연극 <바냐 삼촌> 공연 장면. 체호프의 원작을 동시대 바냐 삼촌인 ‘이서진 삼촌’을 통해 재해석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찌질미의 대명사 황동만이 대세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 박해영 극본, 차영훈 연출)의 주인공으로 20년째 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그는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엑스(X)’ 같은 인간이다. 황동만(구교환 분)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건 변은아(고윤정 분)와 교류하면서다. 변은아는 그의 초라함 너머 감정의 결을, 그 안에 있는 반짝임을 알아본다. 왜 존재하는지도 모른 채 꾸역꾸역 사는 황동만과 변은아를 보면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1899)가 떠오른다. 삶의 피로감을 딛고, 권태와 절망 속에서도 다시 하루를 사는 바냐와 소냐가 그곳에 있다

현재 한국 연극계는 ‘바냐대전’ 중이다. 손상규 연출의 <바냐 삼촌>과 조광화 연출의 <반야 아재>가 무대에 올랐다. 다른 각색과 스타 캐스팅으로 같은 고전을 다르게 변주하는 풍경은 이례적이다. 안톤 체호프 원작은 제정 러시아 말기, 평생 매형을 위해 헌신하다 뒤늦은 환멸에 빠진 바냐의 이야기다. 자신이 받들어온 매형이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영지로 내려오면서 바냐의 억눌린 욕망과 자기 연민은 극에 달한다. 총까지 잡고 분노하지만 다 무위로 돌아가고 바냐는 조카 소냐의 다독임 속에 다시 장부 앞에 앉아 삶을 이어간다.


손상규 연출의 <바냐 삼촌>(안톤 체호프 원작, 손상규 각색·연출, 이단비 드라마터그, 김종석 무대, 김형연 조명, 카입 사운드, 김환 의상)은 ‘이서진 삼촌’이라고 불리는 배우 출신 예능인 이서진의 캐릭터에 천착한다. 이서진 그 자체인 바냐는 역설적으로 가장 동시대적 바냐로 와닿는다. 이서진이 나이 드는 과정을 함께 한 대중은 ‘내 인생도 이렇게 지나가버렸구나’를 인식하며 마음을 연다.

고아성의 소냐는 현실을 너무 잘 알아 담담하게 견디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독백도 견디는 사람의 호흡을 터득해 질긴 존재감을 이어간다. 후반부 교수(김수현 분)의 영지 매각 선언 이후 분노한 바냐가 총을 들고 겨냥했으나 실패로 끝난 후, 무대를 짓누르던 거대한 벽체가 천장과 양옆으로 탈거되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인물들을 붙들고 있던 권위와 자기기만, 삶의 환상이 함께 벗겨져 나갔기 때문이다. 남겨진 것은 일상 속 노동공간이다. 테이블과 의자, 서류 더미 위에서 지난 삶을 후회하지만 다시 사는 바냐 삼촌의 오열과 노동에 대한 연극적 롱테이크는 견딤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조광화 연출의 국립극단 <반야 아재>(안톤 체호프 원작, 장한 번역, 윤서현 드라마투르기, 조광화 번안·연출, 이태섭 무대, 정태진 조명, 차이킴 의상)는 시공간 배경을 일제강점기 충청도 지주의 고택으로 번안했다. 은희(심은경 분)는 고택 댓돌 위아래, 차 마시는 정자와 서재가 있는 중앙 연못 위 사랑채, 감자 찌는 솥이 걸려 있는 부엌과 지하수 펌프를 뛰어다닌다. 아버지 병후(남명렬 분)와 새엄마 영란(임강희 분), 할머니 말례(손숙 분)와 객으로 머무는 의사 해일(김승대 분)을 챙기기 바쁘다.

낡은 지주계급 잔해와 식민지 근대화의 기계장치가 기괴하게 겹쳐진 고택 심부는 반야 아재 이보(조성하 분)의 노동력이 집약된 정미소다. 연못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사랑채는 실제 물이 무대 위로 쏟아지는 비바람 장면에서 일상을 잊고 낭만을 꿈꾸는 시적 공간이 된다. 고택 안쪽 계단과 정미소 구조물은 2막 후반에 무대 전면으로 달려든다. 마치 익스트림 클로즈업되듯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로 대변되는 노동의 흔적이 웅장하고 섬세하게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동시대 청년들의 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 공연 장면. 공놀이클럽 제공


필자는 이 작품을 1층과 3층에서 연이어 관람했다. 연극적이면서도 영화적인 미장센 덕에 객석 아래에서 볼 때는 인간들의 소란스러운 치정극으로 보였던 무대가 위층에서는 배우들의 동선이 도드라져 억압적인 사회상을 드러내는 구조극으로 읽혔다. 정미소 벨트는 쉼 없이 돌아가는데 등장인물은 제자리걸음이고 일본 순사는 고택의 중정을 제집처럼 침범한다. 배우들의 동선 자체가 곧 일제강점기 사회상이자 체호프의 뉘앙스다. 체호프의 원작을 각색하고 번안한 시선의 차이는 마지막 명대사에서 드러난다. <바냐 삼촌>의 소냐가 “우린 쉬게 될 거예요”라며 다독였다면, 반야 아재의 은희는 “그렇게 아파도, 우린 도망가지 않았구나. 살아갔구나”라며 지나온 생존을 확인한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다시 딛고 일어서게 하는 이 격려는 엄혹한 시대를 통과하는 인간에게 절실한 위로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한다.


<바냐 삼촌>과 <반야 아재>의 인물이 영지와 고택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서로의 진심을 비껴간 채 독백을 남발한다면, 20대 청년 작가 조민송의 데뷔작인 창작 초연 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조민송 작, 강훈구 연출, 이예원 무대·소품·의상 디자인, 이경은 조명)는 다른 방식으로 진심을 전달한다. 미미(박은경 분)는 잠적한 애인을 찾기 위해 화장품 방문판매를 자처하며 창전동 원룸의 문을 두드린다. 연결을 원하면서도 상처가 두려워 문틈만 열어둔 인간의 정서적 풍경은 “방판의 핵심은 판매가 아니야. 방문이야”라는 대사로 대변된다. 트랜스포머처럼 변화하며 여러 주거 공간을 만들어내는 방화문과 거대한 외벽은 단순 재현을 넘어 청년 세대의 고립된 심리 구조물이다. 미미는 문을 두드리고 기대며 도시 균열 사이에 낀 동시대 청년들을 엿본다. 사소한 농담과 엇박자의 대화, 미묘한 침묵 속 진심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농담으로 희석하는 서툰 청년의 언어는 일상 뒤 본심을 숨기던 체호프의 인물과 닮았다.

가정폭력의 트라우마 속 성인이 된 미미는 사과받지 못한 상처로 인해 스스로도 사과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폭력은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타인과 맺어지는 언어 자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에게 방치된 폭력의 잔상에 갇혀 있던 <모자무싸>의 변은아를 연상케 한다. 그런 미미가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기승(류세일 분)에게 건네는 “미안해”라는 서툰 사과는 단순한 화해가 아니다. 방판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마주하고 그들을 격려해온 시간이 이뤄낸, ‘언어 회복’의 순간이다.

소냐와 은희, 미미와 변은아는 닮았다. 자기 상처보다 타인의 균열을 먼저 감당하며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끝내 관계의 마지막 끈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는 영웅의 성공담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정미소를 버티고, 무너진 영지에서 다시 장부를 펼치며, 닫힌 문 앞에서 끝내 타인의 마음을 두드리는 ‘대단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살아내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그 삶은 대부분 초라하고 흔들린다. 그러나 상처 입은 사람만이 타인의 균열을 먼저 알아본다. 황동만이 변은아를 통해 존재의 희미한 반짝임을 발견했듯, 우리도 누군가의 삶에 겨우 작은 ‘오(O)’ 하나를 그려주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체호프의 바냐가 그랬고, 미미와 기승이 그러하며, 황동만과 변은아가 그러하듯, 지금 우리도 그렇다.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을 기어이 견뎌내는 동력이다. 다른 작품은 상연이 끝났고, <미미의 미미한 연애>는 6월 7일까지 마포아트센터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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